
몇 년 전 여름, 나는 통장에 여윳돈이 거의 없었다. 월급 들어오면 적금이랑 투자로 최대한 밀어넣는 게 잘하는 거라고 믿었거든. 근데 그해 에어컨이 고장 났고, 며칠 뒤엔 치과에서 갑자기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. 두 개 합쳐서 130만원쯤. 통장 잔고는 40만원이었다.
그때 계좌를 보고 한숨이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.
적금 깨기 아까워서 카드로 막았다
제일 멍청했던 판단이 여기서 나왔다. 3년짜리 적금을 깨면 우대금리를 다 날리니까, "그냥 카드 할부로 막고 다음 달에 갚자"고 생각한 거다. 근데 그 다음 달에 또 예상 못 한 지출이 생겼고, 결국 리볼빙(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)에 손을 댔다.
리볼빙 수수료율이 그때 연 18% 안팎이었다. 100만원을 이월하면 한 달에 이자만 1만 5천원 정도다. 별거 아닌 것 같지? 근데 이게 몇 달 쌓이고, 다음 달 결제금액에 또 얹히면서 원금이 잘 안 줄어든다. 적금 우대금리 아끼려다 그보다 훨씬 비싼 이자를 낸 거다. 계산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 짓이었다.
결국 비상금이 없어서 생긴 일
핵심은 이거였다. 나한테 "그냥 꺼내 쓸 수 있는 돈"이 없었다는 것.
적금도 있고 투자도 하고 있었지만, 둘 다 지금 당장 손대면 손해 보는 돈이었다. 적금은 우대금리를 날리고, 주식은 하필 그때 물려 있어서 팔면 손실 확정이었다. 자산이 없는 게 아니라, 유동성이 없었던 거다.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.
요즘 특히 이게 더 크게 와닿는다. 지난달 발표된 6월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3.2% 올랐고, 체감에 가까운 생활물가지수는 3.4% 상승했다. 석유류는 24.7%나 뛰었다. 이런 시기엔 예상 못 한 지출도 같이 커진다. 차 기름값, 장보기, 외식비 다 오르니까. 여유가 없을수록 비상금이 더 필요한데, 정작 물가 오르면 비상금 모으기는 더 힘들어진다. 악순환이다.
지금은 이렇게 한다
그 일 겪고 나서 순서를 바꿨다. 투자보다 비상금이 먼저다.
나는 생활비 3개월치를 기준으로 잡았다. 우리 집 한 달 필수 지출이 대략 200만원이라 600만원을 목표로 뒀다. 이걸 파킹통장에 넣어뒀다. 자유입출금인데 하루만 넣어도 이자가 붙는 상품. 지금 파킹통장 금리가 대체로 연 2%대 후반에서 3% 초반 사이라, 600만원 넣어두면 세전으로 한 달에 만 몇천원 이자가 나온다. 큰돈은 아니지만, 최소한 돈이 놀지는 않는다.
중요한 건 이 돈은 "없는 셈" 친다는 거다. 투자 잔고랑 심리적으로 완전히 분리해놨다. 계좌 이름도 아예 '비상금-건들지마'로 바꿔놨다. 유치한데 은근 효과 있다.
3개월치가 정답은 아니다. 프리랜서나 소득이 불규칙한 사람은 6개월치를 권하는 경우도 많고, 맞벌이라 둘 중 하나가 실직해도 버틸 수 있으면 좀 적게 잡아도 된다. 각자 상황 봐서 정하면 된다. 다만 "0원"만 아니면 된다. 그게 그때의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다.
돌아보면 130만원 때문에 리볼빙까지 간 게 아니라, 비상금 0원이라는 상태를 방치한 대가였다. 다들 파킹통장에 얼마나 넣어두시는지 궁금하다. 댓글로 알려주시면 나도 참고하려고.
※ 이 글은 개인적인 정보 공유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. 모든 투자 판단과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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